시(時) 이야기/작가시 27

홀로서기---서정윤

둘이 만나 서는게 아니라 홀로선 둘이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 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 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

사모---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 나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인연설---한용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합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 버려야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가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르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지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애처롭기까지만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

신부---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 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 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

작가시(조병화)

[조병화] 시인.(1921 ~2003 )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적으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시인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평이한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상, 198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및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

오우가---윤선도

나의 벗이 몇이나 있느냐 헤아려 보니 물과 돌과 소나무, 대나무다. 게다가 동쪽 산에 달이 밝게 떠오르니 그것은 더욱 반가운 일이로구나. 그만 두자, 이 다섯 가지면 그만이지 이 밖에 다른 것이 더 있은들 무엇하겠는가? (水) 구름의 빛깔이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 소리가 맑게 들려 좋기는 하나, 그칠 때가 많도다. 깨끗하고도 끊어질 적이 없는 것은 물뿐인가 하노라. (石) 꽃은 무슨 까닭에 피자마자 곧 져 버리고, 풀은 또 어찌하여 푸르러지자 곧 누른 빛을 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松) 따뜻해지면 꽃이 피고, 날씨가 추우면 나무의 잎은 떨어지는데, 소나무여, 너는 어찌하여 눈이 오나 서리가 내리나 변함이 없는가? 그것으로 미루어 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