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이병률 백년을 만날게요 십 년은 내가 다 줄게요 이십 년은 오로지 가늠할게요 삼십 년은 당신하고 다닐래요 사십 년은 당신을 위해 하늘을 살게요 오십 년은 그 하늘에 씨를 뿌릴게요 육십 년은 눈 녹여 술을 담글게요 칠십 년은 당신 이마에 자주 손을 올릴게요 팔십 년은 당신하고 눈이 멀게요 구십 년엔 나도 조금 아플게요 백 년 지나고 백 년을 한 번이라 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당신을 보낼게요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9.05.14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조병화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내일이 어려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오늘이 지루하지 않아서 기쁘리 살아가면서 언제나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늙어가는 것을 늦춰서 기쁘리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먼저 떠나 이 세상에서는 만나지 못하더러도 그것으로 얼마나 행복하리 아, 그리운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날이 가고 날이 오는 먼 세월이 그리움으로 곱게 나를 이끌어가면서 다하지 못한 외로움이 훈훈한 바람이 되려니 얼마나 허전한 고마운 사랑이런가.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8.02.25
단풍드는 날---도종환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제 몸의 전부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방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가장 황홀한 빛깔로 우리도 물이 드는 날.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8.01.14
방문객---정현종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 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8.01.09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서정주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7.11.05
청춘---샤무엘 울만 "靑春"이란 人生의 어떤 한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미 빛 볼, 붉은 입술, 강인한 육신을 뜻하지 않고,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과, 그리고 人生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참신함을 뜻합니다. 생활을 위한 소심성을 초월하는 용기, 안이함에 집착을 초월하는 모험심, "靑春"이란 그 탁월한 정신력을 뜻하나니 때로는 20살의 청년보다 60살의 노인이 더 "靑春"일 수 있네. 우리는 누구나 세월만으로 늙어가지 않고,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어 갑니다. 세월은 살결에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을 상실할때 영혼이 주름지고, 근심, 두려움, 자신감 상실은 기백을 죽이고, 정신을 타락 시키네. 그대가 젊어 있는 한 60살이건 16살이건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는 경이로움의 동경과 아이처럼 ..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8.29
사랑의 전설---원태연 얼음나라 공주님과 불의 나라 왕자님은 더 이상 이대로 바라만 보고는 살 수 없다는 생각 끝에 단 한번 서로를 만져볼 수 있는 것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대신하고자 약속했습니다 "다음엔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겠어요." 한 걸음씩 서로의 손끝이 가까워질수록 얼음나라 공주님은 온몸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고 다가가고 있는 왕자님의 몸은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서요 망설이지 마시고...어서요." 공주님의 아픈 눈물에 왕자님이 멈칫 망설이고 있던 시간에 이미 공주님은 여전히 눈물되어 흐르고 있는 작은 손끝만을 남긴 채 나머지 몸은 눈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대여 다음엔 당신과 같은 몸으로 태어나 영원히 안아주겠소 약속하오." 녹아 흐르는 작은 손끝을 잡아보려 공주님의 눈물 속으로 뛰어든 왕자님의 몸은 ..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5.15
흔들리며 피는 꽃---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5.15
낙하---조지훈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허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5.06
초혼---김소월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여! 사랑하던 그 사람여! 붉은 해는 서산 마루에 걸리었다 주작새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