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5.01
아흡가지 기도---도종환 나는 지금 나의 아픔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아픔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나의 절망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오직 나의 절망만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깊은 허무에 빠져 기도합니다 그러나 허무 옆에 바로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나는 지금 연약한 눈물을 뿌리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남을 위해 우는 자 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죄와 허물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또 다시 죄와 허물로 기도하지 않게 하소서 나는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내 이웃의 평화를 위해서도 늘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영원한 안식을 기도합니다 그러나 불행한 모든 영혼을 위해 항상 기도하게 하소서 나는 지금 용서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을 더욱 사랑할..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4.24
진달래---이해인 해마다 부활하는 사랑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네 가느단 꽃술이 바람에 떠는 날 상처 입은 나비의 눈매를 본 적이 있니 견딜 길 없는 그리움의 끝을 너는 보았니 봄마다 앓아 눕는 우리들의 지병은 사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한 점 흰구름 스쳐가는 나의 창가에 왜 사랑의 빛은 이토록 선연한가 모질게 먹은 마음도 해 아래 부서지는 꽃가루인데 물이 피 되어 흐르는가 오늘도 다시 피는 눈물의 진한 빛깔 진달래여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4.13
친구에게...---이해인 부를 때마다 내 가슴에서 별이 되는 이름 존재 자체로 내게 기쁨을 주는 친구야 오늘은 산 숲의 아침 향기를 뿜어내며 뚜벅뚜벅 걸어와서 내안에 한그루 나무로 서는 그리운 친구야 때로는 저녁노을 안고 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내안에 들어와서 나의 메마름을 적셔 주는 친구야 어쩌다 가끔은 할 말을 감추어둔 한줄기 바람이 되어 내안에서 기침을 계속하는 보고 싶은 친구야 보고 싶다는 말속에 들어 있는 그리움과 설레임 파도로 출렁이는 내 푸룬 기도를 선물로 받아주겠니 늘 받기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할때 방긋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주던 따뜻한 친구야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어 모였다가 어느날은 한편의 시가 되고 노래가 되나 보다 때로는 하찮은 일로 너를 오해하는 나의 터무니없는 옹졸함을 나의 이기심과 허영심과 약점들을 비..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4.09
사람이 사람에게---이채 꽃이 꽃에게 다치는 일이 없고 풀이 풀에게 다치는 일이 없고 나무가 나무에게 다치는 일이 없듯이 사람이 사람에게 다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꽃의 얼굴이 다르다 해서 잘난 체 아니하듯 나무의 자리가 다르다 해서 다투지 아니하듯 삶이 다르니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니 행동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니 사람이 다른 것을 그저 다를 뿐 결코 틀린 것은 아닐 테지 사람이 꽃을 꺾으면 꽃내음이 나고 사람이 풀을 뜯으면 풀내음이 나고 사람이 나무를 베면 나무내음이 나는데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면 사람내음이 날까 ~~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 밉게 보면 잡초 아닌 풀이 없고 곱게 보면 꽃 아닌 사람이 없으되 그대를 꽃으로 볼 일이로다 털려고 들면 먼지 없는 이 없고 덮으려고 들면 못 덮을 허물 없으되 누..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1.2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유미성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애절한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보고싶다는 말보다 더 간절한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벗어나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숨어있던 그대만을 위해 쓰여질 그 어떤 말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대만을 위한 아주 특별한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난 오늘도 여전히 그대에게 사랑한다는 말밖에는 그 어떤 그리움의 말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늘 언제나 그대에게 쓰는 편지의 시작은 사랑하는, 보고싶은, 하지만 그 마음 너무나도 따뜻한 그대이기에 그대를 위해 쓰여진 내 평범한 언어들은 그대 마음속에서는 별이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가 됩니다.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1.20
목마와 숙녀---박인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 보아야 한다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1.17
별 헤는 밤---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경,옥 이런 이국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1.10
서시---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1.10
눈오는 날에---서정윤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리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시(時) 이야기/작가시 2016.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