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時) 이야기/작가시

작가시(조병화)

푸른바위 2010. 3. 20. 00:11

[조병화]

시인.(1921 ~2003 )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사범학교, 1945년 일본 도쿄[東京(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1949년 첫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2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3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적으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시인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평이한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19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1974년 한국시인 협회상, 198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및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1982∼1984년 시인협회장, 1989∼1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19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시론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 대며 밀려 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 날이 온다.

그 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 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 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시방은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 생명을 만드는 쉼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

 

[고독과 그리움]
쓸쓸합니다.
쓸쓸하다 한들
당신은 너무나 먼 하늘 아래 있습니다.
인생이 기쁨보다는 쓸쓸한 것이 더 많고,
즐거움보다는 외로운 것이 더 많고,
쉬운 일보다는 어려운 일이 더 많고,
마음대로 되는 일 보다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고,
행복한 일보다는 적적한 일이 더 많은 것이라고 알고는 있지만,

이렇게  외롭고 쓸쓸할 땐 한정없이 당신이 그리워집니다.
이러한 것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이라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당신이 그립습니다.

참아야 하겠지요. 견디어야 하겠지요.
참고 견디는 것이 인생의 길이겠지요.
이렇게 칠십이 넘도록 내가 아직 해탈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고독'입니다.

살기 때문에 느끼는 그 순수한 고독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제일로 무서운 병은 고독입니다.
그 고독 때문에 생겨나는 '그리움'입니다.

'고독과 그리움',
그 강한 열병으로 지금 나는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습니다.
이렇게 당신을 앓고 있는 '고독과 그리움'이
얼마나 많은 작품으로 치료되어 왔는지
당신은 알고 계실 겁니다.

지금 그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그리움',
그 쓸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독과 그리운 사연'을 당신에게 보냈습니다.

세월 모르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에 대한 내 이 열병 치료는
오로지 '고독과 그리움'을 담아 보내는 이 나의 말들이옵니다.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심하게 생겨나는 이 쓸쓸함,
이 고통이 나의 이 가난한 말로써
먼 당신에게 전해졌으면 합니다.

만분지 일이라도.
어지럽게 했습니다.
난필(亂筆)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많이 늙었습니다. 미안합니다

 

[낙 엽]

당신 생각만 했지요

당신께만 할 이야기가 많았지요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지요

초록색 몸차림을 하고 단장을 하고

바람이 불어도 비가 내려도

당신 생각만 했지요

어느 날 당신이 내 그늘 아래 쉬었을 때

그때 내 마지막 그 말을 당신에게 주는 걸 그랬어요

헤어진다는 것은 영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헤어진다는 것은 아주 잊어버린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 생각만 했어요

당신께만 할 말이 많았어요

어제와 오늘이 이렇게도 먼 이 자리에서

당신만 기다리다 말았어요

 

[남 남]

네게 필요한 존재였으면 했다그 기쁨이었으면 했다사람이기 때문에 지닌 슬픔이라든지, 고통이라든지번뇌라든지, 일상의 그 아픔을맑게 닦아낼 수 있는 네 그 음악이었으면 했다산지기가 산을 지키듯이적적한 널 지키는 적적한 그 산지기였으면 했다가지에서 가지로새에서 새에로꽃에서 꽃으로샘에서 샘으로덤불에서 덤불에로숲에서 숲에로골짜기에서 골짜기에로네 가슴의 오솔길에 익숙된충실한 네 산지기였으면 했다그리고 네 마음이 미치지 않는 곳에둥우릴 만들어내 눈물을 키웠으면 했다그리고 네 깊은 숲에보이지 않는 상록의 나무였으면 했다네게 필요한, 그 마지막이었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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