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時) 이야기/작가시

신부---서정주

푸른바위 2015. 12. 15. 09:18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 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 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재와 다홍재로 내려 앉아 버렸습니다

 

[푸르른 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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