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時) 이야기 96

서시---윤동주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길 잃어 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눈오는 날에---서정윤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밟히고 있다. 날리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 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날개라도, 눈처럼 연약한 날개라도 가지고 태어났었다면 우연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만남을 위해 녹아지며 날아보리라만 누군가의 머리 속에 남는다는 것 오래오래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것조차 한갓 인간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눈물로 알게 되리라. 어디 다른 길이 보일지라도 스스로의 표정을 고집함은 그리 오래지 않을 나의 삶을 보다 답게 살고 싶음이고 마지막에 한번쯤 돌아보고 싶음이다. 내가 용납할 수 없는..

홀로서기---서정윤

둘이 만나 서는게 아니라 홀로선 둘이 만나는 것이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 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 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

사모---조지훈

사랑을 다해 사랑하였노라고 정작 할 말이 남아 있음을 알았을때 당신은 이미 남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불러야 할 뜨거운 노래를 가슴으로 죽이며 당신은 멀리로 잃어지고 있었다. 하마 곱스런 눈웃음이 사라지기 전 두고두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잊어달라지만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다섯 손가락 끝을 잘라 핏물 오선을 그어 혼자라도 외롭지 않을 밤에 울어보리라. 울다가 지쳐 멍든 눈흘김으로 미워서 미워지도록 사랑하리라. 한 잔은 떠나버린 너를 위하여 또 한잔은 너와 나의 영원한 사랑을 위하여 그리고 한 잔은 이미 초라해진 나를 위하여 마지막 한 잔은 미리 알고 정하신 하느님을 위하여

자화상(3)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건 조금씩 삶의 시간을 잃어가는 과정일까... 아니면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일까... 인생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희생시켜 무엇인가를 찾고 얻어가는 과정이라면 난 잃어버린 만큼 무엇을 얻은 것일까... 얻은 것보다 잃어버린 것이 많은 인생 그래서 이뤄야 한다는 다급함에 쫓기고 손실만큼 무엇인가로 보상 받으려고 이리저리 허둥대는 모습이 불쌍한 오늘.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걸까. 잃은 것보다 알지 못하는 무지가 슬픔의 무게를 더하여 전해온다. 남들을 보며 상대적 빈곤감에 빠지고 성공을 꿈꾸지만 자꾸만 멀어져만 가는 때론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며 지친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지만 굴러가는 시간의 톱니바퀴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난 과정을 반복한다.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건..

인연설---한용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합니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 버려야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표정은 이별의 시작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가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르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잠시라도 함께 할 수 있음을 기뻐하고 더 좋아지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애처롭기까지만 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드립니다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

신부---서정주

신부는 초록 저고리와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 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 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년인가 오십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 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스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

반만의 사랑

기억하고 싶지만 잊어야만 하고 기억되고 싶지만 잊혀져야만 하는 바라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 아쉬움이 많은 우리네 인생 그래서 가끔의 기쁨에 많이 감사하는 걸까... 만나고 헤어짐이 많은 오늘 떠나보낼 때 조금 덜 아파하고 새로이 누군가 다가왔을 때 거부하지 않는 편한 사랑을 하자 모든 것을 다 주어버리기에 이루지 못할 사랑될 때 모든 것을 잃고 텅 빈 마음 되어 힘들어 하는 것이 아닐까... 내 마음의 반만으로 사랑을 하자. 너무 큰 것을 바라지도 말고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만 주고 잃어도 슬퍼하지 않을 만큼의 조금은 부족한 사랑을 하자. 아픔으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반만의 사랑. 그러면 혹시 헤어질 때에도 어색한 표정일지라도 웃음지어며 보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1)

하고 싶은 일을 방해 받고 원하지 않는 일을 강요당하는 내 의지와는 다른 길로 걸어가는 듯 한 삶의 방향. 그래서 문득 나선 곳에 서 있는 듯한 나를 발견하고는 당황스러워 하는 나는 과연 내 삶의 주인일까... 자유로운 사고가 억압받고 자아의 행동이 구속받는 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고 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나의 길로 가기를 다짐하지만 작은 저항으로 그치고 고개 숙이는 나는 진정한 내 인생의 주체일까... 내 마음에 일어나는 나쁜 생각들. 악이 주는 충동질일까 아니면 나를 알아보기 위한 선의 시험일까... 그럼 착한 생각들은 선의 인도일까 아니면 악이 나를 쉬이 다스리기 위한 선을 가장한 미끼일까... .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가는 선악의 생각들. 무엇을 잡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분명하지 않는..

자연과의 교감

눈 깊은 적막한 산길을 걸을 때 자연의 아름다움에 즐거우면 추위조차 포근하고 위험조차 잊혀지고 한없는 평화로움이 찾아온다. 지저귀는 새소리, 눈꽃들의 속삭임. 그리고 들려오는 만물의 이야기들... 나는 그들의 일부가 된다. 거짓말 같은 현상에 머리 흔들어 깨어보지만 알 수 없는 힘에 동화된다. 힘든 시간 속 잠깐의 착각일까... 살아 있는 생명간의 교감일까... 그리고 전해오는 신비로운 힘 자연의 법칙과 세상의 비밀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는 느낌 하나라도 간직하면 이득이 될 것 같건만 순식간에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간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 자연과 이야기를 해보자. 생활의 편익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지 말고 공동 생명체로서 친해보자. 그리고 그들이 가르쳐 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그러면 자연은 ..